집어넣는 대신 꺼내는 교육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
얼마 전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이라는 TV프로그램이 인기리에 종영됐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행하며 잡학다식 수다풀이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교육에 대한 통찰이 의미심장하다.
하나, 집어넣는 교육이 아니라 ‘꺼내는 교육’.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유시민 작가에게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깨닫게 한다. 냉동인간에 대한 토론 중 불치병에 걸린 억만장자가 300년 동안 냉동되는 설정으로 질문이 제기되자 유작가는 인생의 의미는 생물학적 생명 보다 타인과의 관계이므로 타인이 모두 죽은 몇백 년 후에 깨어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삶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자 정교수는 “300년이 아니라 3개월간 냉동되었다 깨어나서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그래도 의미 없는 집착인가?” “예전에는 일찍 죽었을 생명들을 현대에는 의학기술로 살려내고 있는데, 그럼 이 경우도 자연의 순리를 벗어난 것이라 삶에 어리석게 집착하는 것인가?” 등 생각을 꺼내는 질문으로, 유 작가 같은 논리로 답변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의 인식이 과학기술과 윤리에 대한 중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집어넣는 교육으로는 결코 얻지 못할, 천하의 논객 유 작가도 바꾼 ‘꺼내는 교육’의 진수다.
둘, 비판적 사고의 시작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 ‘알쓸신잡’의 인기 요인에는 일방적 강연과 달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관점을 주고받는 케미(사람끼리 호흡이 잘맞는 것)도 있다. 출연자들 각자가 말하는 관점이 훌륭한 케미를 이루면서 시청자들의 인식과 지적 안목을 확대시킨다. 교수들이 이렇게 팀 티칭을 하면 학생들의 지적 안목은 무한대로 확장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지식을 다르게 생각해보는 시도, 무리(無理)가 아니면 일리(一理)로 받아들이는 태도, 나의 지식도 진리가 아닐수 있고 내 생각 이외의 다양한 일리들도 존재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아쉽게도 주어진 정답 찾기 시험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길러지기 어렵다.
셋, 각 과목의 학자나 전문가가 납득할 시험이어야. 한 번은 소설가 김영하가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반대한 일화가 소개됐다.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면 영광일 터임에도, 김영하는 문학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어야 하는데 그중의 몇 단락만 잘라서 교과서에 게재하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교과서에서 빼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학작품은 통으로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게 해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일부만 잘라서 지문으로 제시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끊임없이 난도질을 하여 저자도 모르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 정답 찾기를 한다는 것이다.
브루너 교수의 ‘나선형 교육과정’은 교육과정 이론의 고전이다. 나선형 교육과정의 핵심은 교육과정은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난이도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지식 구조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물리학자가 물리학실험실에서 하는 사고 과정을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하게 그러나 초등생의 논높이에 맞는 용어로 가리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적 활동을 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전문가의 활동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활동을 강요한다. 한국 학생들은 저자조차 자신의 문학작품에 대한 시험문제를 풀 수 없는 국어 시험을 보고, 피카소도 맞힐 수 없는 미술 시험을 풀며, 옥스퍼트대 영문과생도 알수 없는 영어시험을 공부하고, 서울대의 관련 전공 교수도 제한된 시간 내에 절반도 풀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수학 시험을 본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이런 교육을 내용 변화는 전혀 없이 단지 몇 과목을 절대평가로 할지 소모적인 논쟁 속으로 국민을 몰아넣고 있다. 어차피 동일한 시험문제를 푸는데 그게 절대평가가 된다고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역량이 길러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