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민주화, 투자의 민주화, 성장의 민주화
기고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의 편중과 빈부격차 문제를 내제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승자 독식체계, 돈이 돈을 버는 구조야 말로 시스템의 기본 룰이라며 이에 쉽게 승복한다. 극소수의 ‘혁명가’는 착취적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며 체제 전복을 꿈꾼다. 반면, ‘혁신가’는 자본주의의 무넺를 자기 방식대로 개선하기 위해 시스템 안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낸다.
빌 게이츠는 ‘모든 가정마다 퍼스널컴퓨터(PC)가 놓이는 세상’을 꿈꿨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컴퓨터는 너무 비싸고, 너무 어려운 첨단기기였다. 그는 컴퓨터가 대중화되면 다음 세대의 ‘뒤처진 누군가’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극소수의 특권층과 국가에 집중되혁신 기술의 문턱을 일반 대중에게 낮춘 일, 어떤 이는 이를 ‘기술의 민주화’라 부른다.
자본시장에도 게이츠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존 보글은 투자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한 1975년, 그는 세계 최초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를 출시했다. 당시에는 개별 종목을 적극 발굴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스타 펀드매니저가 시장을 주도하던 때였따. 많은 이들은 지수를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는 보글의 투자전략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세운 뱅가드그룹은 운용자산 5조달러(5600조원)의 세계 최대 뮤추얼 펀드 운용사로 성장했다. 단기수익에 집착하기보다 장기 생산성 제고에 주목해야 한다는 원칙과 시장을 이기는 개인은 없으며 시장은 결국 성장한다는 믿음은 현대 투자론의 기초 철학이 됐다.
보글의 가장 위대한 점은 ‘투자’를 일반대중의 삶으로 끌어들인 데 있다. 인덱스 펀드가 출시되기 전까지 펀드는 금융회사가 소수 부유층이나 기관을 상대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추천해주는 상품 정도로 인식됐다. 펀드 수수료는 일반인이 감내하기엔 너무 비쌌다.
낮은 수수료와 이해하기 쉬운 상품 구조의 인덱스 펀드는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개인들이 투자를 통한 부의 축적과 노후 대비에 과님을 갖게 된 것도 그의 공이 크다. 그는 단순히 투자계의 거물로 남은 걸 넘어 많인 이들로 하여금 ‘나’와 다음 세대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했다. ‘투자의 민주화’라는 말이 있다면, 분명 보글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할 것이다.
‘투자의 민주화’를 통해 자본시장은 단순히 부자들의 투전판이 아닌 더 많은 이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향유하게 해주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따. 특히 저성장·저금리 시대를 맞으며 노후 대비와 자산 증식을 위해서는 자본시장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런 자본시장에 새로운 소명이 생겼다. 최근 정부는 담보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새로운 자금 조달 창구로 자본시장을 주목하고 있다. 은행과 정부정책자금에 의존해온 혁신성장의 자금 물꼬를 트는 데 자본시장의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자본시장이 잠재력은 있지만 자금을 구하지 못한 ‘뒤처진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면 ‘투자의 민주화’를 넘어 ‘성장의 민주화’에 일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월 16일은 보글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려던 혁신가였다. 자본주의는 결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남다른 이상을 가진 혁신가의 도전은 시장과 제도의 발전을 도모하는 원동력이다. 그들의 고민이 ‘더 맣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더불어 잘 사는 것’에 있는 한, 내일은 어제보다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위대한 ‘월가의 성인’이자 ‘가장 자본주의적이었던 혁신가’의 죽음에 애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