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여름이 시원한 이유
이진우 경제부장
위도 1도의 열대국가지만 충분한 국가 전력 확보로 걱정없이 에어컨 트는 나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에너지 백년대계’ 정책
위도 1도에 위치한 열대 국가. 하지만 막상 싱가포르에 가보면 ‘무덥다’는 느낌은 없다. 에어컨 덕분이다. 일단 건물 안에 들어가면 온몸이 서늘할 정도다. 싱가포르의 7월 평균 최고 기온은 섭씨 31도인데, 사무실 에어컨은 대게 18도에 맞춰져 있다. 땀이 흘러도 금방 마를 수 밖에 없다.
싱가포르의 에어컨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 전 총리는 생전에 싱가포르 성공의 ‘수훈 갑(甲)’으로 주저없이 에어컨을 꼽았다. “에어컨이 있었기에 온종일 경제활동이 가능해졌다. 내가 총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공건물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로 전기다. 당연한 예기지만 에어컨을 틀려면 전기가 있어야 한다. 전기없는 에어컨은 쇳덩이일 뿐이다. 그래서 리콴유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전력 확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추진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싱가포르의 에어컨 보급은 충분한 전력 확보 이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날에도 싱가포르는 전기를 펑펑 쓴다. 에어컨뿐만 아니라 야간 조명에도 전기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기 아껴 써라’, ‘전기료 폭탄 터진다’, ‘블랙아웃을 조심하라’는 등의 얘기가 전혀 없다. 편리한 만큼 알아서 쓰라는 입장이다.
싱가포르에선 이른바 ‘전력 복지’가 철철 넘친다. 전력예비율은 무려 30%에 달한다. ‘블랙아웃’ 걱정이 없다. 전기요금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한국과 엇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누진제가 없고 시간별 요금제가 적용돼 밤 11시~오전 7시까지는 전기요금이 매우 저렴하다. 연평균 전기요금은 한국이 더 저렴하고, 여름철 냉방 비용까지 감안하면 싱가포르가 더 싸다고 한다. 여건상 원자력발전을 하지 못하는데도 이런 기적을 일으켰다. 치열한 경쟁과 촘촘한 인구밀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싱가포르 전력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두 가지 화도를 던지고 싶어서다.
첫째 화두는 아시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1인당 GDP 5만3000달러), 청정국가, 허브국가 이미지로 막대한 수입을 얻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원자력발전소 도입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원전 도입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히고 있다. 2014년에는 원전 기술 평가와 전문가 양성을 위해 64000만싱가포르달러를 투입하는 5개년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민간에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원전 설비를 바지선 위에 얹어놓고 인공 방파제에 계루시키는 ‘부양식 해상원자력발전소(floating nuclear plant)’를 짓자는 구상이다. 좁은 국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데다 바닷물을 냉각수로 끌어다 쓸 수 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하며 원전 바지선을 먼 바다로 내보내면 된다. ‘에너지 백년대계’를 끊임없이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멀쩡히 잘 진행되던 원전 공사까지 중단하는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두 번째는 ‘전력 복지’다. 엊그제 산업통상자원부는 ‘하절기 공공기관 에너지절약 대책’이란 걸 내놨다. 내용은 매년 똑같다. 공공기관 실내온도를 28도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경제성장을 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허탈한 대책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5만될러가 되면 뭐하나. 여름이면 땀으로 멱을 감아야 하는데. 앞으로 원전을 못 짓게 돼 전기가 모자라고 전기요금이 올라가면 국민들은 이런 불편을 한참 더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각급 학교 교실과 국 막사에 에어컨이 설치되고, 그에 필요한 전력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충분히 공급하는 국가가 선진국이다. 우리가 아는 선진국들은 다 그렇다. 왜 한국은 그런 나라가 못 되는 걸까. 왜 매년 여름마다 블랙아웃과 전기료 폭탄을 두려워해야 할까. ‘탈(脫)원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새 정부가 했어야 할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