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는 장벽을 쌓는다
장경덕 칼럼
논설실장
극단적인 분열의 시대
정치인과 지식인은 이념과 계층을 넘을 다리를 놓아라
30년 전 베를린장벽이 무녀졌을 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장벽은 결국 무너진다!
요즘은 그 확신이 흔들린다. 낡은 장벽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새로운 장벽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기필코 세우겠다는 멕시코 국경의 장벽뿐만이 아니다. 지구촌의 70억 남짓한 인구 중 줄잡아 7억명이 다른 나라에 가 살고 싶어한다. 가난한 이민자를 막아서는 부자나라들의 장벽은 자꾸만 높아지고 있다.
지금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3000명의 글로벌 파워 엘리트가 ‘세계화 4.0’ 시대의 개방과 포용의 길을 고민하고 있다. 상품과 자본과 사람과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반세계화와 역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외선 센서와 카메라가 설치된 미국과 유럽 국경의 장벽이든 디지털 세상의 만리장성이라 할 중국의 인터넷 방화벽이든 본질은 한 가지다. 외부자로부터 자신의 기득권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이다.
외부자는 나라 밖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이념과 계층, 세대로 갈린 ‘우리’와 ‘그들’간 장벽은 어느 때보다 겁이 많은 이들은 더 기를 쓰고 장벽을 세우려 한다. 대중의 분노와 공포를 부추기는 포퓰리즘 정치인과 무책임한 지식인들이 장벽의 설계자와 수호자로 나선다.
불행히도 이 극단적인 분열의 시대에세도 한국은 유별난 사례다. 한국에서는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두 진영 간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오랫동안 사이좋게 동행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불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에서는 그 불화가 유독 심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다시 대중의 뜻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마땅하다. 포퓰리스트는 소수의 권리를 무시하는 다수의 압제를 부추길 수 있다. 이는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가 말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문제다. 대중의 힘겨운 삶에 냉담한 엘레트는 흔히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공동체를 끌고 가려 한다. 이는 ‘비민주적인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주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망각한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개개인의 생각과 이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이해가 충돌하면 타협해야 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이들은 개인의 자유는 곧 공동체의 이익을 임식하는 이기주의와 탐욕의 동의어라고 오해한다. 오해와 편견은 뿌리 깊다. 관용은 찾아볼 수 없다.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은 장벽을 쌓는 사람들이다. 이념의 양 극단으로 치달을 뿐 중간지대에서 상대의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흑백논리와 선명성 경쟁은 난무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다수 유권자들이 몰려 있는 회색지대는 용인하지 않는다. 설득과 타협이라는 정치인 본연의 책무는 같곳없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튜브에서 분노와 혐오의 언어만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라. 이들은 엄연한 언론인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게이트 키핑 기능이 없으니 막말과 극단적인 진영 논리가 난무한다. 이처럼 개방성과 초연결성의 상징과도 같은 플랫폼에서도 장벽은 건재한다. 자기 진영에 아부하는 기술로 돈을 버는 이들이 넘친다.
미래에 대한 대중의 불안과 공포가 커질수록 온갖 장벽을 쌓는 사람들은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장벽은 안전을 희구하는 이들에게 잠시 위안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무너지는 것은 조악한 콘크리트 장벽뿐만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가속의 시대에는 어떤 이념과 정당, 어떤 시장과 기술도 안전하지 않다. 심리적인 자위수단에 불과한 장벽을 쌓기보다는 개방과 경쟁으로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게 더 안전할 것이다. 물론 낙오하는 이들을 위한 안전망을 갖추는 것은 필수다. 그러자면 권력과 금력을 쥔 이들이 더 넓은 품으로 상대를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정치인과 지식인은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성세대와 미래세대를 갈라놓은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그들 사이에 장벽을 쌓는 이들은 기회주의적인 장사꾼일 뿐이다. 벽을 쌓지 말고 다리를 놓아라. 이것이 바로 이 분열의 시대에 정치인과 지식인이 가슴에 새겨야 할 정언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