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초호황은 대박일까 저주일까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반도체 산업의 높은 변동성은 한국 경제의 위험 요인이다. 삼성전자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한 다음 해부터 3년간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달러 값은 대폭 떨어졌고 김영삼정부는 세계화 기치를 내걸고 해외여행 자유화와 주식·채권 시장 개방을 앞당겼다. 대구의 섬유, 부산의 신발 등 전통적 수출 종목이 저환율 날벼락에 쓰러진 직후 반도체 가격도 공급과잉으로 폭락했다. 1996년부터는 수출 수량도 감소세로 돌아셨고 수출대금은 급감했다. 때맞춰 발생한 한보·기아 사태로 은행 부실화 우려가 고조되자 해외자본이 자금을 거둬가면서 외환보유액은 바닥났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에 목을 메는 처지가 됐다.
김대중정부의 빅딜 해프닝 여파로 19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흡수 합병하면서 하이닉스가 출범했다. 초기부터 자금난에 허덕이던 하이닉스는 2002년부터 3년간 D램시장 호황이 재현됨에 따라 워크아웃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2006년 이후 반도체가 침체로 반전되자 다시 부실화됐다. 2008년에는 달러 값이 폭등했고 선박 건조 관련 외화 선수금에 대한 환헤지용 선물환 매도 계약을 대거 체결한 조선사는 막대한 손해를 떠안았다. 결산서에서는 환율 상승 이익과 선물거래 손실이 상계된 것으로 표시됐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손해였다. 선물환 비중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STX는 부도가 났고 통화옵션상품(KIKO)에 가입한 중소 수출업체의 피해도 엄청났다. 원매자없이 떠돌던 하이닉스는 2012년 최태원 회장의 결단으로 SK에 인수됐다.
2016년부터 반도체 호황이 재현됐는데 이번에는 슈퍼 사이클이다. 조선·해운업을 비롯한 대부분 업종이 극심한 불황을 겼는 상황에서 반도체 홀로 대박이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국제회계기준(IFRS) 수익회계 변경으로 반도체 대박 풍선은 더욱 부풀려지게 됐다. IFRS15에서는 건설공사나 선박건조 계약에 있어서 발주처에서 대금 지급을 확약하지 않으면 진행율 기준을 적용할 수 없고 완성품을 인도해야 수익인식이 가능하다. 판매했더라도 무상서비스 기간이 종료돼야 수익을 인식할 수 있고 품질보증비용의 중요성에 따라 수익인식을 미뤄야 한다. 장기공사와 신제품 등의 수익인식 시점이 뒤로 밀리는 상황에서는 반도체 같은 성숙단계 제품 수익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기업의 혁신 성장이 가능하다.
무역 강대국 중 유일하게 기축통화에 끼지 못하는 한국에서 변동성이 높은 반도체는 환율 그라운드의 악동(惡童)이다. 벌어들인 달러를 모두 국내에 반입하면 달러 값이 폭락 해 다른 수출업체의 가격경쟁력은 추락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불공정 무역과 환율조작 혐의를 뒤집어 쓴다. 하이닉스의 올해 반도체 수익은 28조~29조원으로 예상되는데 최태원 회장이 바쁜 걸음으로 국내외 투자를 지휘한다. 올해 중국 투자는 벌써 3조원을 넘어섰고 일본 도시바 지분의 인수도 마무리 단계다. 반도체 수익 전망치가 72조~78조원에 이르는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 재판을 받는 형국이라 리더십이 적막강산(寂寞江山)이고 자사주 매입 소각이 소일거리다.
반도체 경기와 다른 사이클의 먹거리를 찾아 과감한 장기투자를 결단해야 한다. 중기적 관점에서는 메모리 반도체가 창출하는 데이터와 프로세스 용량 증가로 인한 전력소요 급증 상황에 맞춘 신재생 에너지와 배터리 투자도 좋은 대안이다. 상법상 임기가 3년으로 제한된 이사가 장기적 투자를 결단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재선임을 겨냥해 주주들이 선호하는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 소각에 매달릴 유인이 크다. 혁신 성장의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주된 수익원이 쇠퇴하면 ‘노키아의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의 권한과 민형사 책임을 동시에 강화하는 지배구조 합리화와 스튜어드십코드 실천을 통한 기관투자가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전제로 경영 능력을 갖춘 대주주 경영인의 리더십을 인정해야 한다. 기업규제를 혁파하고 미래이익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법인세 인상보다는 혁신 성장을 이끌 연구개발 촉진에 중점을 둔 세제개편이 이뤄져야 한다.